发布时间:2012-03-15 11:28 作者:宁波韩语培训
굴원(屈原, 기원전 340년~기원전 278년)은 성씨가 굴(屈)이며 이름이 평(平), 자가 원(原)이다. 전국시기 초나라 사람으로서 초무왕(楚武王)의 아들 굴하(屈瑕)의 후대이다.
굴원은 중국의 위대한 애국시인 중의 한명으로서 최초의 저명시인, 사상가, 위대한 정치가이다. 그는 "초사(楚辭)"라는 문체를 창립했으며 "향초미인(香草美人)"의 전통을 창립했다. "이소(離騷)", "구장", "구가", "천문"은 굴원의 주요 대표작이며 그중 "이소"는 중국에서 가장 긴 서정시이다. 오늘날에 본 굴원의 작품은 전부 서한 유향(劉香)이 편찬한 "초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은 주로 굴원의 작품을 집중시킨 것인데 그중 "이소" 1편, "구가" 11편 외 "동황태일", "운중군", "상군", "상부인", "대사명", "소사명" 등 수많은 작품들을 담고 있다.
굴원은 젊은 시절 초회왕(楚懷王)의 신임을 받아 좌도(左徒)와 삼려대부의 중책을 맡아 국사를 담론했고 법률제정에 참여했다. 굴원의 노력하에 초나라는 국력이 일정한 정도로 제고되었지만 본인의 솔직한 성격, 타인들의 이간질과 배척에 의해 초회왕은 점차 굴원을 멀리하게 되었다. 기원전 305년 굴원은 초회왕과 진(秦)나라의 황극지맹(黃棘之盟) 체결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초나라는 진나라와의 동맹을 결정한다. 굴원은 초회왕에 의해 한북(漢北)에로 추방되었다. 유배기간 굴원은 분개하여 문학창작을 시작했는데 작품은 초나라에 대한 그리움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려는 열정을 담고 있었다. 문자가 화려하고 상상이 기이한 이 작품은 비유가 독특하고 내포한 의미가 심각했기에 중국문학의 기원 중의 하나로 뽑히고 있다. 기원전 278년, 진나라 장군이 병사를 거느리고 남하해 초나라 서울을 공략하자 굴원은 절망과 비통을 못이겨 결국 멱라강에 투신해 자살한다. 1953년은 굴원 별세 2230주년이 되는 해로서 세계평화이사회에서는 결의를 통과해 굴원을 그해 기념한 세계 4대 문화명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확정했다.
本文来自:宁波韩语培训